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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란 무엇인가?(2)
1988년 12월 20일 (화) 00:00:00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부록>
박옥수, 그는 누구인가, 박옥수 구원관과 그 문제점

필자에겐 인간 박옥수의 모습이 별로 밝혀진 바 없다. 구 자신이 밝힌 바에 의하면, "1962년 거듭난 후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20여 년간 교파를 초월하여 말씀의 종으로 전국 각지에서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분명하게 증거하여 평신도는 물론 목회자들도 죄사함을 받고 거듭난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돕고 있으며, 현재는 서울 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시무중이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박옥수 저, 기독교문서선교회 1987. 5).

언제 신학을 했는지,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지 , 어떻게 대한예수교침례회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설교 속에서 보니 그는 경상북도 낙동강 유역에서 땅콩 통사를 짓는 농부의 아들이었다는 점과(p.34), 첫 목회를 대구에서 시작했다는 점을(p.44) 알 수 있다.

필자가 개인 박옥수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그의 사상을 더 잘 알아 비판하기 위한 목적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독자들 중 인간 박옥수를 아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나 자료가 있으면 제공해 주기 바란다.

본인의 관심은 그의 사상이다. 아직 박옥수 씨에게서 권신찬 씨와 같은 종말론을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흔적은 거의 보지 못하였다. 또한 교회론에 있어서 늘 반 교회적이요, 기성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흔적은 가득 차 있으나, 교회론이라고 말할만한 사상적인 체계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오직 구원론에 그의 모든 설교가 집중되어 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 내지는 죄사함 문제만 취급했다. 그런 점에서 박옥수는 구원지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고, 그의 이단 시비는 오직 구원론에만 집약된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박옥수 씨의 구원론은 기독교복음침례회의 권신찬 씨와 대한예수교침례회의 이요한(이복칠) 씨의 구원론과 아무 차이가 없으면서도 자신들은 구원파가 아니라고 한다는 점이다. 필자가 볼 때, 박옥수 파가 권신찬 파나 이요한 파를 부정해야 할 사상적 차이는 조금도 없었다. 그들은 분명 형제이어야 하고, 서로 교단 통합추진위원회라도 만들어야 하며, 서로 존경하고 높여야 더 정직할 터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이요한 파도, 권신찬 파를 싫어하고, 박옥수 파는 두 파와 다르다고 주장하여 자신들은 구원파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교단이 다르다고 같은 구원받은 형제들끼리 그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박옥수 씨의 설교를 보면 그는 루터와 무디를 좋아하고, 특히 홍대위 목사를 존경한다고 하였다. 홍대위 목사를 존경하는 데는 이해가 간다. 홍 목사의 사상은 박씨와 같은 사상으로써 단회적인 회개만 인정하고, 구원받은 후 다시 회개가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점으로 홍 목사를 좋아하는 박옥수 씨는 이해가 되지만 루터나 무디는 구원을 강조했다는 점만 일치할 뿐, 회개의 단회성을 주장한 자들은 아니었다. 물론 존경할 자유까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루터나 무디의 사상이 박씨 때문에 더럽혀질까 걱정스럽다.

박씨의 구원론을 본격적으로 비판해 보자.

1. 구원지상주의자 박씨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란 책은 1986년 10월 6일부터 10일까지 부산 무공화회관(이사벨여자고등학교 대강당)에서 한 설교를 수록한 것으로 그가 집회시마다 주로 사용하는 설교들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는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죄사함에 관한 방법을 다 찾아보았다고 한다(p.44). 물론 그의 주관적인 입장이요, 그의 잘못된 성경해석에 의한 주장들이었다. 한 마디로 박씨는 구원지상주의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구원은 중요하다. 그러나 구원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하나는 넓은 의미의 구원이요, 하나는 좁은 의미의 구원이다. 구원의 단계와 서정을 여러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하는데, 크게 보면 중생 즉, 거듭남으로써의 구원과, 그 후에 따르는 성화의 구원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를 좁은 의미의 구원이라 할 수 있고, 후자까지 포함시켜 넓은 의미의 구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박씨는 이 좁은 의미의 구원에만 모든 관심을 다 모아 마치 기독교의 전부가 구원이요, 성경의 전부가 구원인 양 생각하게 되었다. 자연히 그 결과 성경이 억지로 해석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박씨는 죄사함과 구원을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에 매 페이지마다 이 죄사함이란 단어와 사상이 거의 빠진 일이 없다.

물론 구원은 중요하다. 거듭나지 않고, 죄사함을 받지 않고서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아무 말거리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일단 생명이 태어난 후부터 삶이 시작될 수 있는 것과 같다. 태어남이란 태어나기 전까지만 모든 것처럼 보인다. 산모의 소망은 오직 건강한 출산에만 모든 관심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일단 태어나면 그것은 모든 것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기독교인에게 죽은 자의 행실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런데도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초보이니 버리고 완전한 데 나아가라고 하였다(히 6:1-2). 성경 전부를 좁은 의미의 구원에다 초점을 맞추려다 보니 억지로 성경을 풀게 되고, 그러다보니 박씨는 풍유적 성경해석 방법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2. 죄와 범죄를 잘못 구별하는 박 씨

박씨는 그의 책 29페이지 이하에서 보면 요한일서 1:9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는 성구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도둑질, 거짓말, 살인, 간음이 죄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손톱이 빠지고, 눈썹이 빠지며, 코가 일그러지는 것은 문둥병의 결과이지 문둥병 자체가 아닌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감기가 콧물 기침을 하게 하는 것처럼, 죄와 범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죄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범죄만 해결하려고 합니다. 본문은 '범죄를 자백하면'이라 하지 않고,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도둑질, 거짓말, 살인은 죄가 아니고 범죄라고 하는 것이다(p.31) 이어서 그는 구약 다윗의 경우를 들었다. 그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간음죄를 짓고 우리아를 죽이는 5절에 보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근본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점을 고백했다는 것이다.

이 점이 그의 사상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상이 발전되어 새벽마다 울며불며 통회자복하는 기성교인들은 죄를 해결하지 못하고, 범죄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으로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주장하게 되었고, 또한 죄만 고백하고 해결하면 구원을 받게 되며, 그 후부터 죄는 용서되었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게 되고, 회개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박씨는 더 나아가서 의인이냐, 죄인이냐를 물어서 죄인이라고 하면 아직 의인된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정죄해 버리는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된 것이다. 위의 문제들은 앞에 충분히 비판되었으니 본 글에서는 다른 관점에서 취급해 보겠다.

그의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과 얼마나 멀고 다른지 비판해 보자.

첫째, 박씨 말처럼 성경은 죄와 범죄를 그렇게 구별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선입견에 의한 것이다. 그 증거를 세 군데만 들어보자.

① 시편 51편 -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경이다. 그는 자기 필요에 의해 여러 번 말했지만 스스로 자기 귀를 막고, 하나님의 말씀을 안 받아들이고 있다. 그의 말대로 하면 14절에서,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했는데 이 '피 흘린 죄'는 '피 흘린 범죄'에서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이 구별하지 않는 것을 왜 구별하는가?

② 삼하 24:10 - 다윗이 하나님께 하지 말라는 인구계수를 하여 하나님께 교만의 죄를 범하였다. 그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했다. 박씨의 말과는 정반대다. 죄가 있어서 인구계수의 범죄를 했다고 해야 할 터인데,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다"고 하였고, 그 죄를 "큰 범죄를 하였다"고 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종의 범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지도 않았다.

③ 마 6:12 - 주기도문의 일부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다. 박씨 말대로 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었다"는 말이 불가능하다. 또한 박씨의 말을 인정한다면 우리 인간이 인간에게 범죄할 수 있어도 죄를 지었다는 말이 불가능할 것이다. 더욱이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범죄가 아닌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가?

둘째, 박씨 말로 하면 예수를 믿은 후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의 주장대로 하면 예수를 믿은 후 죄를 짓는 것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어 버린다.

박 씨는 인간이 노력해도 술 담배가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인간이 범죄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범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p.16).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심으로 죄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것이다. 죄를 해결해야 하고, 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며(p.31), 오직 예수를 영접할 때 그 예수께서 죄를 해결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예수를 영접한 후에 죄 지을 욕망이 사라지고 그 후에는 죄를 안 짓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겨날 것이다. 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고 남고 있고, 또 죄를 계속 짓는다고 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제한된다는 말이 될 것이고, 죄를 안 짓는다고 하면 거짓말장이가 될 것이다. 더욱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죄인이라고 하면 구원을 못 받은 자로 정죄해 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영접한 후 의인이 되었는데 왜 소위 범죄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셋째, 박씨의 주장대로 하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가 합리화 되어버린다. 회개 무용론은 예수의 사죄를 강조하는 것 같지만 결국 율법폐기론에 빠지게 되고, 심지어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다. 결국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사실상 조롱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해 그는 원죄와 자범죄의 구별 또는 죄인과 죄의 구별을 잘못해서 그런 것 같고, 죄인이 되었기에 죄를 지은 것이 사실이나 또한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되었고, 뿐만 아니라, 죄를 짓고 죄인임을 더욱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것도 과거시제가 아닌 현재시제로 말이다(딤전 1:15)

3. 비 성경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확증하는 박씨

성경이 구원을 확증하라 했으니, 확증할 수 있다(고전 13:5). 그러나 구원을 확증할 때 다음 방법으로 확증하는 것이 잘못이다.

첫째, 구원받았느냐는 질문이다. 이들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자기들만 구원에 대해 전용특허를 받을 양 묻기를 즐겨하고 조금이라도 기분 나빠하거나 대답을 회피하면 구원받지 못한 자로 정죄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먼저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주권사상을 무시하고 있는 교만의 죄요, 다음에는 질문하는 자신들만이 구원을 시험할 수 있는 시험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교만을 범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나 예정설이란 말이 성경에 없는 말이라고 해서 그 말을 사용하기조차 싫어하는 저들인데 왜 성경에 없는 방법을 보편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는가? 더욱이 구원의 확신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의 확증이 있다는 점을 상기하고 좀 하나님과 말씀 앞에서 겸손하게 회개하지 않겠는가.

둘째, 구원받은 년, 월, 일, 시, 장소를 묻는 것이다. - 성경은 즉각적인 구원을 말하고 있다. 삭개오, 강도, 간수장이 그렇다. 그러나 점진적인 구원도 말하고 있다. 박씨는 점진적인 구원은 인정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이야기 해 보자. 구원파에 속한 자가 한 성도에게 구원받았느냐고 묻자 받았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언제, 어디에서 받았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대답을 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언제부터 자전거를 타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것이오." 그러자 구원파에 속한 그 사람은 한 마디의 대답도 못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구원은 현재가 중요하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말씀이 주관적인 내 확신보다 더 앞선다는 점이다.

셋째, 죄인이냐, 의인이냐 묻는 것이다(본문 참조).
넷째, 죄를 회개하느냐, 안 하느냐를 묻는 것이다(본문 참조).

 4. 성경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박씨
우리는 성경에 대해 해석적인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하나의 성경에 수도 없는 교회와 수 없는 교파가 생기게 된 것이다. 열심 있고, 불타는 확신이 있어도 성경 앞에 바로 서지 못하면 결국 사망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성경해석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 성경해석은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역사적, 문화적, 유기적 그리고 신학적 해석을 해야 한다. 그런데 자기 사상에 성경적인 분위기의 옷을 입히려고 하는 자마다 하는 성경해석 방법이 있다.

그것이 소위 풍유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이다. 필자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단들마다 모두 이 풍유적 해석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박씨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얼마나 엉터리 같은 성경해석을 했는지 그의 풍유적 해석의 없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가 신학을 제대로 배웠다면 이렇게 성경을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① 열왕기하 7:1-9에서, '네 사람의 문둥이'란 제목의 설교가 있다. 그가 즐겨하는 설교중 하나이다. 네 명의 문둥이가 굶다굶다 최후에 아람 진에 항복하러 갔다가 아람 군대들이 다 도망하게 되어 음식을 얻게 되고 구원을 얻는 사건이다. 그곳에서 적군에게 항복한 것처럼 자기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방법으로 안 되기 때문에 새로운 방법으로 발을 내딛는 그런 자를 하나님께서 찾고 계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아람 군대에 항복하는 일이 내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하는 일이 되는가? 아람 군대가 하나님을 상징한다는 성경적 뒷받침이 있거나, 적군에게 항복하는 일이 하나님께 항복한다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성경적 뒷받침이 있을 때에만 이 해석이 가능해질 것이다.

② 창세기 27:1-23에서, '야곱과 에서'란 설교에는 더욱 풍유적 해석이 많다. 박씨는 아버지 이삭은 하나님의 그림자요, 어머니 리브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형 에서는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축복 받으려고 하는 사람의 그림자요(마치 기성교인을 자칭하는 것 같은 인상), 동생 야곱은 자기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만 예수님의 도움으로 축복 받는 자의 그림자(구원파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 같은 인상)라는 것이다(p.59). 그렇다면 아버지 이삭이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약속(창 25:23)을 받고도 잘못하여 에서를 축복하려는 잘못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며, 또한 리브가가 자기 꾀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려는 잘못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리고 언제 박씨 말처럼 에서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었는가(p. 63)에서는 물질 중심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경히 여기는 사람이 아닌가?

③ 더욱 웃지 못할 박씨의 해석은 야곱이 에서처럼 털을 붙이고 나간 사건을 자기를 가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한 점이다(p. 67). 자기가 조금이라도 노출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신학을 제대로 했다면 이런 해석을 감히 할 수도 없고, 성도를 미혹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속이려고 털을 붙이고 나간 행위를 자기를 숨기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해석하니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능력이 털끝만큼만 있다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 무지한 해석을 할 수 있겠는가?

④ 그보다 더욱 모순된 것은 야곱이 자기의 이름으로 나가지 않고 형의 이름으로 나간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신앙의 형님 되신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p. 70). 조금 전에 p.59에서의 형에서는 지옥 자식의 그림자라고 해 놓고, 이제 형 에서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복을 받는다니 한 자리에 앉아 거짓말을 하는 파렴치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성경해석이 아닌가?

⑤ 누가복음 10:25-37에서 '강도 만난 자'란 설교이다. 이 본문만큼 풍유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주 무대는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 만난 자를 제사장도, 레위인도 지나갔건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버려진 상태가 내 마음, 내 생각을 다 버리고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영적 상태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야 사마리아인이 도와 준 것처럼 주님이 찢고 꿰매어 주신다는 것이다(p. 211). 강도를 만난 일이나 도와주지 않은 것은 강도 만난 자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다. 박씨 말대로라면 내가 자청하여 강도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⑥ 더욱 우스운 것은 상처가 난 곳에 사마리아인이 기름을 붓고 포도주를 발랐는데, 순서가 원래 포도주를 먼저 붓고 기름을 발라야 하는 것이 응급치료의 방법인데 왜 거꾸로 했는가? 이유는 기름은 성령을 가리키고 포도주는 기쁨을 가리키는데 성령이 먼저 와야 기쁨이 온다는 것이다(p. 214).

이쯤 되면 아예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상식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연현상을 통해 상식을 넘어서는 영적 교훈을 주신다는 말인가?

⑦ 이어서 사마리아인이 "자기 짐승에 태워"라고 했는데, 이는 주님이 타야할 자리에 우리를 태우시고 우리가 걸어야 할 낮은 위치에서 짐승의 고삐를 잡고 가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이다(p. 215).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여관집 주인이 치료해 주었는데 여관집 주인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성령이라도 상징한단 말인가?

⑧ 끝으로 사마리아인이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었는데, 이는 유대인들에게 한 데나리온이 하루의 생활비이며 하루 품삯이었는데, 두 데나리온은 이틀을 말하는 것으로 주님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약 2천년 후에 주님이 우리를 데리려 오실 것을 약속하고 계시다는 것이다(p. 219). 이곳에서 보면 박씨도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믿는 것 같다. 그 점은 취급하고 싶지 않고, 단지 그의 성경해석을 볼 때 재고의 가치를 못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것들을 골라내면 수도 없이 많다. 어느 한 편의 설교에도 이 같은 풍유적 해석이 없는 곳이 없다.

5. 구원파를 경계하라

박씨는 반 교리적인 이단집단의 교주이다. 그는 기성교회와 기성교인을 공격하는데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 불신자 편보다 신자편에 더 많은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수도 없이 십일조를 바치는 행위, 주일 지키는 행위, 기도에 참석하는 행위들을 공격하고, 특히 목사, 장로, 집사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박씨의 사상에 들어가면 기성교회를 비판하게 되고, 교회를 떠나게 된다는 점이 그 증거 중 하나이다.

본인은 어떻게 해서 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박씨의 책을 출판해 주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이단인줄 알고 출판해 주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단자들은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 그런 점에서 정통교리를 공격하면서도 정통교회의 방송, 출판 등의 채널을 이용하려 한다.
이미 밝혔듯이 경상도 지방의 교회가 피해가 가장 크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부산, 대구 등에서 전화와 편지가 많다는 점이요, 방문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끊임없이 다가오는 이단들에 대해서 믿음의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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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최삼경 목사가 <구원파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집필한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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